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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해방‘청해진’역적의 논리 커져가고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8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6.11 09:59
  • 수정 2021.06.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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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에게 신라의 흥덕왕은 만인의 백성을, 신무왕은 식읍2천호를, 문성왕은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장복을 내렸다. 그럼 식읍 2천호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신무왕이 식읍 2천호를 주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진해장군(鎭海)에 봉했다. 이는 분명 기록에 나와 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낙동강 하구의 진해(鎭海)를 생각하는 것이다.


낙동강 하구의 넓은 진해를 장보고에게 준 것으로 보고, 거기를 관할하는 장군으로 봉했다고 생각한다. 진해(鎭海)란 말은 청해(淸海)와 아주 어울리는 말이다.
완도에 땅을 주었다면 청해장군이라 했겠지만 청해를 떠나 신라의 알짜배기 땅, 신라를 지키는 낙동강 하구의 기름진 땅, 신라의 의식주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물자가 오가는 항로를 지키라는 의미에서 진해장군으로 봉했을 것이다. 그리고 진해 땅을 통솔하도록 했을 것이다. 장보고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진해 땅이 장보고 땅이라는 것을 역사에서 명확히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사뭇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어떤 역사든 어디의 역사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역사는 없다. 밑바탕에는 반드시 그 역사를 떠받드는 문화가 존재한다.
사회, 경제, 정치, 철학 등의 하부구조가 튼실해야만 역사는 창조되고 지속되며 계승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문화의 바탕이 없는 역사는 없다는 것이다. 신라도 마찬가지고 장보고고 마찬가지다. 거시적으로 보든, 미시적으로 보든 문화가 가지는 역할은 하루아침에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장보고는 신라의 다섯 왕을 거쳤다. 흥덕왕(828)을 시작으로 희강왕을 거치고, 왕위을 찬탈하여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헤친 민애왕을 몸소 경주까지 거동하여 살해하고, 청해진까지 찾아와 신라를 구해야 한다며 장보고를 설득한 신무왕을 옹립시킴으로써 킹메이커로서 장보고가 등극했다.
그리고 문성왕 때에 암살(841)을 당하였다. 불과 13년동안에 다섯명의 신라왕을 겪어낸 장보고이다. 쉽게 말해 장보고의 5천 기병이 민애왕의 10만대군을 격파할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나아가 장보고가 실제로 신라정권의 붕괴를 바랬다면 충분히 신라왕족을 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보고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 약속대로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옹립시키는 것으로 순조로운 신라왕실의 정통성 회복을 도왔을 뿐이다. 반란을 꿈꾸었다면 민애왕을 제거하고 신무왕을 옹립하기 전에 반란을 했을 것이다. 장보고에게 반란의 덫을 씌운 김부식도 결국은 신라왕족의 후예이지 않는가? 신라왕실의 정통성을 회복시킨 진해장군을 골품제도에 찌든 시각으로 끝내 진해장군이라 하지 않고 궁복(弓福)이라고 애써 하대하고 있는 것의 실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삼국시대가 남북국시대로 전환하면서 남은 점령지 구백제권 사람들 특히나 6천년 전부터 문화를 만들고 이어오면서 전승해오던 완도사람들이 장보고를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장보고는 왜 완도를 그의 본영으로 삼았을까?
장보고가 완도를 본영으로 삼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청해진을 본영으로 삼아 청해(淸海)라는 이념을 실천하며 완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 사람들의 빼어난 손재주와 기술로 세계를 개척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는 당나라에 있으면서 완도에서 성공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신라에 가서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았던 것이다.
  장보고는 완도 출신임이 분명하다. 삼국사기는 신라사람이다는 것은 분명하게 하고 있으나 고향과 조상들은 모른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정년전에 정년이 장보고를 찾아가겠다고 말하면서 “况死故郷耶”(다만 고향에 가서 죽겠다)고 말한 기록으로 보아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 있음을 알고 정년은 “고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고향의 선후배 사이로 장보고와 정년은 청해진제국을 이끌었다. 따라서 고향의 사람들을 모를 리 없었다. 수많은 완도 사람들이 장보고를 따라 모여들었다.


그래서 청해를 건설하는 명분으로 인간해방을 내걸었다.
감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인류보편적 가치를 그것도 신라골품제 사회에서 내걸었다. 장보고가 골품제 사회에서 신음하는 구백제권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실로 생각하지도 못할 그야말로 당시의 세계에서는 역적의 논리였던 것이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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