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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무역의 엄청난 재화 신라로 유입

[기획 연재] 한반도 해양문화의 중심 완도학(莞島學) 3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08 10:57
  • 수정 2021.05.0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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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학(莞島學)이 되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기록뿐만이 아니라 사료적인 물증이 필수이다. 단순히 비밀로 분류되어 신(神)만이 안다는 논리나, 말이나 글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로는 완도를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 최대 전성기가 장보고 청해진제국이 혁파된 25년후에 이루어졌다.


결국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영향력이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요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신라에서 대단위 금광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어떤 나라가 신라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니, 신라 자체의 자생적인 부의 창출이 없었다면 결코 전성기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완도 청해진제국이 경영한 해상무역 덕분에, 도자기와 차, 그리고 해상을 장악하여 바다의 물류를 통한 삼각무역으로 막강한 부를 축적한 장보고가 완도에 있었기에 신라는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시장에서 장보고의 도자기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만들기가 바쁘게 팔려나갔고 돈이 밀려들었다. 828년 청해진이 만들어지고 7년이 경과한 835년 흥덕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위력을 암시하고 있다.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澆薄, 民競奢華, 只尚異物之珍竒,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固有常刑.

 

사람은 상하가 있고, 지위에는 존비가 있으니 명칭과 법칙도 같지 않으며 의복 역시 다르다. 풍속이 점차 각박해지고 백성들이 서로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아서, 다만 신이하고 진기한 물품을 숭상하고 오히려 비야(鄙野)한 토산품을 경시하니, 예절이 점차 잃어가는 참람함에 이르고 풍속은 언덕이 평평해지듯이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옛 법칙에 따라 분명한 명령을 내리니, 만약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일정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신라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흥덕왕의 포고문이다. 만약 사치와 호화를 분별없이 누리는 병폐를 고치고자 포고문까지 발령한 것이다. 고의로 어기는 사람은 형벌까지 내리겠다고 했다. 완도의 부흥으로 인하여 돈이 경주로 밀려들어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특히나 백성들은 다투어 사치를 일삼고(民競奢華) 있다는 것도 돈이 유입되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이 또한 당시의 시대상으로 비추어보면 청해진을 개설해준 흥덕왕에 대한 보답으로 장보고의 재화가 신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청해진 개설 7년만에 신라는 사치와 낭비가 분별없이 행해지고 있었고 외부유입 문물에 신라의 신분제 질서마저 흔들릴 위험성을 보이자 이러한 포고문이 내걸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실린 흥덕왕의 포고문 역시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해상무역과 막대한 수익의 창출이 있었기에 내걸렸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세상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라왕실은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황금알을 낳는 완도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사회의 개방은 신라귀족사회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었기에 나서지 못하고 장보고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신라가 어느 정도 대외적으로 장보고에 의해 개방되자 신라 왕권의 정통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성장한 신라귀족들의 돈이 왕실에 흘려들어가고, 귀족들은 왕족들을 선동해서 왕권을 돈과 무력으로 찬탈했다. 대표적인 것이 희강왕을 죽이고 등극한 민애왕이었다. 신라귀족층에 급격한 재화의 유입으로 힘이 생기자 왕권을 위협한 것이다.


  민애왕에 의해 희강왕은 죽임을 당하자 차기 왕권을 희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하는 김우징이 민애왕으로 인하여 왕위에 오를 수 없게 되고 오히려 민애왕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게 되자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장보고는 아무런 댓가없이 신라왕실을 도와 신라의 정통성을 바로 세워 주었다. 그래서 완도 청해진에서 국가적인 제사까지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장보고를 죽이고 나서 미안한 마음에 또한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물론 장보고를 재조명하고 재인식하자는 신라 왕실 내부의 움직임도 있었다. 대구 동화사에 탑을 세우고 보림사에 불상과 불탑을 세우고 또한 완도 체도 중암사지에도 장보고를 위로한 불사를 행했다. 장보고는 반란이 아니라 신라 왕실의 정통성을 되찾아준 은인이라는 의식들이 사후에 퍼져나간 것이다.


  장보고가 신라 경주의 쿠테타 세력인 민애왕을 처단하기 위하여 삼국사기 기록이 나오는 기병 5천명,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이다. 정년과 염장, 낙금, 장건영, 이순행 등등 장보고를 호위하는 청해진의 지도자들이 나선 것이다. 이들이 경주에 들어가 반역자들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으로 옹립했다.
신라왕실도, 귀족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당시 세계에서는 엄청난 제국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해상무역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재화들이 신라로 유입되었다. 황금의 나라가 된 것이다. 황금색의 대저택을 지어 즐겼고 온갖 향락과 사치가 신라를 휘감았다. 처용무가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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