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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탄신제, 군청 문화예술과“우리 일, 아니다”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5.07 13:10
  • 수정 2021.05.0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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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 476주년으로 본보 편집국에선 다음날, 군청 문화예술과 담당에게 충무공 탄신제 사진 한 장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담당자는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 일이 아니다”는 개념 없는 답변과 함께 이어 “이 일은 기념사업회의 일이지, 우리는 지원금만 내줄 뿐이다”고 전했다.
한민족 역사에서 특정 인물의 생일을 기념일로 정한 건 이순신 장군이 유일하고, 이충무공을 단순히 영웅이라 말하지 않고 성스럽고 거룩한 영웅이란 뜻의 ‘성웅(聖雄)'이란 칭호도 이충무공이 유일무이.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 당시 삼남 방문 중, 섬 지역을 방문한 것도 또한 고금도 충무사가 유일한데, 특별히 배편까지 마련해 고금도를 찾았다. 이는 그 만큼 고금 충무사에 대한 위대함과 숭고함 그리고 신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에서 천행(天幸)의 승리라고 소회를 밝힌 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본격적으로 수군재건 활동을 고금도에서 준비했다. 13척의 빈약한 전력의 조선 수군은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5개월간 수군재건에 힘써서 전선 60여 척과 7천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이충무공의 주도하에 고금도를 비롯한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민들의 희생 덕분이며, 이러한 수군재건의 가장 큰 성공요인은 고금도의 유리한 환경과 주민들의 협력 그리고 이충무공의 탁월한 경영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명나라 수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면서 노량해전에서 7년 임진란의 마침표를 찍는 승리와 함께 순국하게 됐는데, 이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했지만 실상은 이곳 고금도에서 출전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승전의 첫머리와 전쟁의 종결지 또한 이곳이다. 그런 의미로 이순신 장군의 주검이 83일간 머물렀으며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또한 최고의 예를 표했던 곳이다.


조명 연합수군의 본영이 있었던 이곳은 문재인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만났을 때 한중우호 증진으로 이곳 고금도를 거론하면서 이충무공과 진린의 우정을 소개했다.
고금도 출신인 김양훈 의원은 남해를 찾았을 때, “노량에서 순국 후 충남 아산의 본가로 운구되기 전 노량나루 근처에 6개월 동안 1차 매장되었다”는 안내표지에 불같이 화를 내며 그곳 담당자와 해설사들에게 고금도 월송대 사진을 보여주며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83일을 머물다 충남 아산으로 옮겨갔다고 시정을 요구했다고 할 만큼, 완도동학농민혁명과 항일운동, 419와 518, 87완도민중항쟁까지 완도 정신의 아버지다.

 

왜, 군수는 이충무공 탄신과 순국일에 가자 않느냐?고 묻자, 군청 모 과장은 "종교적 제의..."라며 말끝을 흐렸지만, 이는 아버지를 기리는 제의에 아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니 완도의 종교권력이 모 교회에서 현 군수가 다니는 교회로 이반됐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제의라는 건 하나의 예의 형식일 뿐이고 제의가 담고 있는 본질은 정신의 바로 세움이다.
큰 절을 안하면 또 어떤가! 연설을 안하면 또 어떻고. 서 있어야할 자리에 서 있는 것, 그것이 진정 자랑스러움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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