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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저택서 출토된 건‘완도황칠’

기사승인 2021.04.30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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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에서 과학이란 “사물의 현상에 관한 보편적 원리 및 법칙을 알아내고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나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에는 물리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만 학(學)이란 말을 붙였으나 현대에는 보편적 가치의 원리와 법칙 즉 문화와 논리라는 개념으로 인문학, 사회학, 역사학 등과 같이 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완도가 우리 사회와 자연에 미친 영향력과 가치, 역사의 근간이며 부를 창출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한 문화를 형성했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완도학(莞島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타 도시가 가질 수 없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완도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 우리 역사에서 완도가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완도는 지명 이상의 커다란 가치를 말하고 있다. 완도가 우리 역사에 미친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남긴 족적은 엄청나고 하나의 학문으로도 충분히 정립될 수 있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그야말로 우리에게 등대와 소금 역할을 하는 문화유산지역이기에 이제는 완도는 지명만이 아니라 가치로도 논해질 수 있기에 완도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완도학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보편적 가치를 가지고 힘의 동력으로 작동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만들지 못한 완도라면 학을 붙일 수도 없을 것이다. 완도가 중심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유지시키는 토대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완도가 우리 역사에서 힘의 원천으로 작동되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875년경에 신라 경주의 인구가 100만명에 달했다는 기록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户, 一千三百六十坊, 五十五里. 三十五金入宅(신라의 전성시대에 서울 안 호수가 178,936호에 1,360방(坊)이요, 주위가 55리였다. 서른다섯 개 금입택(金入宅)이 있었으니...

 다시 말하면 신라의 최전성시기인 875년경에 신라의 가구수가 17만 8,936호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당시 가구당 인원수를 최소 4~6인으로 추산해보면 715,744명에서 가구당 6명으로 보면 1,073,616명이 상주하는 당시 세계에서 몇 번째 안가는 국제적 대도시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875년경 당시 신라 경주가 인구 100만의 세계적인 도시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 화려함이 극치에 이르러 황금으로 만든 대저택(金入宅)이 35채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장보고가 암살된 846년, 청해진제국이 완전히 해체되어  김제의 벽골제로 강제이주된 851년 이후 불과 25년만에 그야말로 경주는 국제적 대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100만의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물질적 의식주 환경뿐만 아니라 영위할 수 있는 지속적인 부(富)의 유입과 창출이 있어야 도시의 건설 및 유지가 가능할 것인데 그 재화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겠는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과연 무엇으로 인하여 신라 경주가 인구 100만의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100만의 인구가 먹고 살 것이 무엇이 있었기에 대도시를 형성하였을까? 그것도 신라를 우리 역사학자들도 신라말기 혹은 하대로 보는 쇠퇴기에 신라 경주의 인구가 100만이었다는 기록을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으나 국립경주박물관에 “황금의 도시 100만의 신라 경주의 모습”이라는 모형물을 제작하여 아주 크게 전시하고 있었고, 첨성대 홍보관에서도 “100만 도시 신라 경주”를 홍보하고 있었다. 십단위까지 기록한 것을 보면 삼국유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면 과연 그러한 도시를 만든 토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도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완도가 100만 경주를 먹여 살렸다는 것이다. 즉 장보고의 청해진제국이 없었다면 신라 경주는 그렇게 커다란 국제적이고도 세계적인 대도시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먼저 금입택에서 찾을 수 있다. 금입택은 황금으로 만든 대저택을 말하고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그 집의 명단까지 구체적으로 적시되어 있다.


도대체 신라의 최전성기라고 할 경주에 금으로 만든 대저택에 있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니 놀랄 일이다.
대단한 도시이다. 얼마나 많은 금이 있었으며, 그 금은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야말로 황금의 도시였다는 소리이다.
그러나 집까지 지을 정도의 진짜 금의 행방은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그 단서는 2006년에 발견되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계림 북쪽 황남동 신라시대 건물유적지를 조사하다가 땅속의 악한 기운을 누르려고 묻은 지진구(地鎭具) 합(盒)이 발견하였다. 그 안에는 딱딱하게 굳은 붉은 황금색의 물질이 발견되었는데 검사해보니 바로 황칠(黃漆)이었다.
완도산에서만 발견되는 베타 셀리넨 성분이 검출되었다. 경주 황남동 금입택 유적지에서 발견된 금의 소재가 바로 완도산 황칠이었던 것이다. 완도에서 추출된 황칠이 신라 경주의 대저택 금입택에 칠해졌다는 것이다. 완도의 물산이 경주로 흘러 들어갔다는 아주 강력한 증거이다..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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