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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김정호의 완도신문이 아니다”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21.04.09 11:36
  • 수정 2021.04.0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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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진
본보 편집국장

 

 

 

 쟌트가르다.

 최강의 사내, 그의 호흡을 이해할 수 없는 이라면 인정치 못하겠지만, 그의 호흡을 이해한다면 그가 ‘잔트가르’라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물론 최고의 권력자를 잔트가르라 할 수 없다. 그건 어느 정도의 실력과 기교, 운의 때만 맞으면 할 수 있으니까. 그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잔트가르인거지, 직위를 얻는 것으로 잔트가르는 아니다.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는 태도와 선택, 말그대로 그냥 죽지도 못하고 깊게 패인 상처에서 피가 철철 넘쳐 쓰러진데도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으며 단 한 줌의 신음조차 토하지 않는 사내, 그가 바로 잔트가르다. 순전히 자기 의지와 신념만으로 어떠한 한계도 규정짓지 않고 소멸되는 두려움 따윈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로지 진실과 정의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가 "우리 막내" 하는 경희 씨는 그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그의 호흡을 이해한다는 뜻이겠다. 혹자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는 언론권력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 그렇다면, 어디 당신이 한 번 해봐라! 이 길이 어떠한 길인지를...‘ 뭐, 정말 개념 없는 일기 수준의 글과 편집으로 “기자입네, 데스크네, 또는 사장이네”한다는 건 진짜 가소로운 일인 것이고, 어디까지나 기자의 글과 편집이란 모든 껍데기들은 걷어낸 채 오로지 진실의 핵심만을 향해 폭풍처럼 돌아가는 회전날이 되어 맹강한 정의의 본질 안을 뚫고 들어가는 일이다. 그건 온몸에 석유를 뒤집어쓰고서 활활 타오르는 불구녁 속으로 가차 없이 뛰어드는 일. 그래서 목숨을 걸고 쓰란 말이 나온 것이며, 데드라인(편집마감)을 넘긴 후엔 온몸에서 갓 나온 새벽신문의 휘발유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고, 그럴 때라야 새롭게 태어나는 것. 언론인의 법정 다툼은 흠결이 아니다. 권력의 의혹을 보도하는 과정이 곧 언론의 자유임으로, 과거 김영록 도지사를 비롯해 몇몇 정치지도자와 법정 다툼이 있었지만, 내가 과연 그처럼 160여회의 피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권력의 블랙리스트로 찍혀 군청공무원들의 공격과 내심 광고주들까지 협박하는 검찰의 협공을 받아가며 3억~4억원의 경영손실을 감수하고서도 신문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백번 생각해봐도 자신이 없다.

 하지만 말이 아닌 소멸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증명된 행위에 마음이 움직여 5년 전, 완도신문의 데스크를 맡게 됐고, 그 과정에서 그와 몇 차례 다툼도 있었다. 그렇다고 떠나진 않았다. 어디까지나 본질은 완도신문의 진실과 정의였으니까. 남자들이야 어릴 땐 주먹으로 싸우지만, 커서는 가슴과 지략으로 나아가 공의와 신의를 위해 싸우기도 하니까.

 시간이 흘러 후임 데스크까지 키워났으니, 이젠 서로 각자의 갈 길만 남았다고 봤다.
그 즈음 떠났던 것이고, 그와의 인연은 그 정도면 될 것이라 싶었는데, 데스크의 부재로 올 1월 중순, 본보의 편집을 돕다가 완전히 인연을 끊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느 늦은 밤, 잔트가르라는 사내가 울고 있다.

 잔트가르의 눈물, 그 눈물은 모든 벽을 허물어 버린다. 다시 돌아와 막내라고 부르는 경희 씨에게 “편집이라는 게, 정말이지 뻣꼴 빠지는 일이요!”하자, “오빠한텐 그런 말 말아주세요!”하며 되레 오빠를 두둔하는데, 그 오빠는 아예 짐 하나를 더 올려 놓는다. 지역신문발전협의회의 정부지원을 받기 위해선 데스크 등록이 필수적이라고. 지난 주 편집국장 사령은 그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김정호의 완도신문이 아니다"
맞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완도신문은 그 누구의 것도, 그러기에 그 누구를 위한 신문이 될 수 없으며, 가장 어두운 곳에서 완도와 완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빛나게 하는 밤하늘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면서 이유가 되는 것. 완도에서 완도신문이 사라진다면, 이곳 완도는? 아마 많은 군민들께서 끔찍해 할 것이다. 오늘날 완도의 주민들이 권력으로부터 굴종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가 있었고 그가 있음으로.

 그가 완도신문을 통해 누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가 완도신문을 통한 권리는 치열한 투쟁의 일선에서 늘상의 패자로서 죽는 날까지 꺾이거나 멈춤 없이 완도와 주민을 위해 상승의 곡선만을 그려갈 뿐이라는 것.

 앞으로 완도신문의 운명은 솔직히 모르겠다.

 다만 완도신문이 무너지는 건, 유능한 데스크(편집자)의 유무가 아니라 그가 손을 놓아버릴 때라는 것이고 완도신문이 무엇을 사랑했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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