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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으로 돌아가면 천하의 대장이 될터

[기획] 완도 고금도 통제영의 전략적 가치 6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4.09 11:20
  • 수정 2021.04.0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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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8년 11월 19일 전사하고 이어 곧바로 2~3일의 왜구잔당 소탕작전을 끝마친 후 이순신과 등자룡의 유해는 고금도로 이송된다. 물론 남해의 충렬사에 잠시 유해를 안치했다. 진린이 아직 왜구들의 소탕을 끝내지 못했기에 잠시동안 유해를 안치했지 결코 가매장 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리고 고금도 조명연합수군 대본영으로 이송되어 진린이 세운 명나라 병사들의 안전과 전승을 비는 관왕묘 부근에 시신을 임시로 안치했다. 등자룡 부총병과 이순신 통제사의 시신이 같이 안치되었을 것이다.

 관왕묘 부근에 시신을 안치한 흔적이 지금 월송대에 남아있다. 과거에는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횟가루를 뿌려 시신을 안치했다. 그래서 지금도 풀이 자라지 못하고 있다. 강력한 증거이다. 등자룡과 이순신의 유해도 횟가루를 뿌려 부패를 방지하고 장례식이 마무리 되어 묻힐 때까지 임시적으로 하는 조치를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2월 11일 예조가 아뢴 글에는 선조의 허가도 없이 또한 진린 도독의 허락도 없이 이순신의 유해를 옮겨 곧 아산의 장지로 도착할 예정이라고 보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조는 이순신의 장례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리고 있다. 등총병의 장례 없이는 이순신의 장례는 없다고 분명한 선을 긋는다.

 이러한 전후맥락이 맞지 않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단순히 “이순신의 상구가 이미 전사한 곳에서 출발하여 아산에 도착할 예정이다”라는 기록만을 그대로 받아들여 고금도에는 많으면 15일 정도 이순신의 유해와 등자룡의 유해가 같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예조가 분명히 실행한 것이 아니라 듣건대(而聞)라고 표현하면서 슬며시 먼저 장례를 지냄이 어떨까요 떠보는 식의 제언과 책임회피성 주장을 하면서 임금인 선조의 의중을 떠보는 내용인데 그것을 그대로 믿고 있는 학자들도 있다. 당시 조선의 장례의식을 말하면서 조선 독자적인 장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진린 도독은 이순신의 장례식을 고금도 도독부 뜰앞에서 1599년 1월 11일 거행했다. <이충무공전서> 12권 부록 4에 기록된 내용이다. 직접 제문까지 지어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했다.

維萬曆二十七年歲次己亥正月壬午朔越十日 欽差総領水兵禦倭総兵管前軍都督府都督僉事陳璘 謹以剛鬛柔毛淸酌之儀致祭于朝鮮水軍統制使李某之靈曰 嗚呼 統制遠藩 〇〇〇〇邦家 五字缺 安危之智提一旅之殘疲 〇〇縣之黑子 絶敵西窺 修我內備 枕戈浴鐵 終日或不暇給 繕艘製器 卒歲無少已 招徠流離者萬家 畔賊逃歸者千計 露梁之戰 統制前鋒舳艫幾陷我 且汝衛而旣脫於虎口 賊由是失銳 徐且戰以且却 遂禽獮而草薙 余謂統制可免夫斯禍 孰知中流矢而捐逝 憶而平居對人 嘗曰 辱國之夫 只欠一死 顧今境土 旣歸大讎 已復緣何 猶踐夫素厲 嗚呼統制 該國凋殘誰爲與理 兵戎狼狽 誰爲振起 豈惟失祈父之爪牙 且喪令鮮之百雉 緬懷及此 詎不流涕 靈魂不昧 鑑是泥沚.
 또한 명황제에게 건의하여 명나라 신하로 명한다는 팔사품을 추증하기도 했다(󰡔李忠武公全書󰡕卷首, 「圖說」).

皇明水軍都督陳璘 具奏公戰功于顯皇帝 帝嘉之 賜公以都督印及令牌鬼刀斬刀督戰旗紅小令旗藍小令旗曲喇叭 至今在統制營

 재조지은과 탄보의 상징이 된 이 <팔사품>은 곧 수군의 원수인 삼도수군통제사가 승선한 좌선(座船)이란 기함(旗艦)에 장대(將臺)라는 누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곳에 통제사의 모습은 그리지 않고 팔사품만 배치되어 있다. 애초에는 이 팔사품이 고금도 통제영에 보관되다가 통영으로 옮겨가게 된다. 보물 440호이다. 이순신의 외손자인 홍우기의 부탁으로 김육(1580~1658)이 쓴 <잠곡유고> 제13권에 실린 통제사 이충무공신도비명의 내용이다.

 진린이, 공이 군사를 다스리고 계책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탄복해 말하기를, “공은 실로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천하의 대장이 될 것이다.” 하고, 상께 글을 올려 말하기를, “이 통제사는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고까지 하였는데, 이는 대개 진심으로 탄복해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명나라 황제에게까지 아뢰니, 황제 또한 가상하게 여겨 공에게 도독인(都督印)을 내렸는데, 이 도장은 지금 통제영(統制營)에 보관되어 있다.
陳見公治兵設策。歎服曰。公非小國人。若入中朝。當爲天下大將。進書於上曰。李統制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蓋心服也。遂奏聞于帝。帝甚嘉之。賜公都督印。至今藏于營。

 이순신의 유해가 없이, 그것도 조명연합수군 총사령관인 진린 도독의 책임하에 관리되어야 할 이순신 통제사의 유해를 마음대로 인출하여 아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당시의 맥락으로 보아 진린의 뜻에도 반하고 선조의 의중에도 반하는 것이 분명하다. 과연 진린과 선조의 뜻에 반해 이순신의 장례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단 말인가? 이순신의 가족에 의해 그랬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순신의 가족이 그랬다는 기록이 없다. 단지 추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의 기록 ‘행록’에도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都督諸將 皆作挽以哀之及撤還 都督入新昌縣 先通來祭之意 適邢軍門差官催上王京 故都督只以白金數百兩齎送之 至牙山縣 邀見公之諸孤 薈往遇於道 下馬謁之 都督亦下馬摻手痛哭 問曰 爾今何官 薈曰 父喪未葬 非得官之時 都督曰 中國則雖在初喪 不廢賞功之典 爾國緩矣 吾當言於國王云云 上遣禮官賜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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