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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수병기창의 보고‘완도 고금도’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21.03.26 14:35
  • 수정 2021.03.26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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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전체가 바로 조선시대 군수병기창이었고 무기보급창이었다는 소리이다. 2017년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처음 전시된 조선시대 미사일인 <대장군전>에 바로 ‘가리포상’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加里浦上” 즉 가리포에서 만들어서 납품한 무기라는 소리이다. 가리포상을 제외하고는 서울 군기시에서 만든 “軍上”뿐이다. 또한 <가리포상 이혈총통>도 분명하게 존재하여 실제 장거리 전투무기가 생산된 거점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까지 밝혀진 무기에서 서울 군기시에서 만든 것과 완도 ‘가리포상’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쟁인력을 보급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포와 관련무기의 제작과 보급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 바로 완도였다는 반증이다. 조선왕조실록 선조33년(1600) 4월 4일 김억추의 장계가 또한 말해주고 있다.


신이 전선 11척을 거느리고 고금도를 지키는 동시에 부근을 통망하기에 마땅한 선산도(현 청산도), 완도(가리포), 지도(신지도), 조약도 등처에서 날마다 조망을 새롭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산도(청산도)는 진의 남쪽에 솟아있어 외양으로 통하는 요충지로서 지난 을묘년(1555년)과 정해년(1587)의 왜변 때 적들이 모두 이 섬을 경유하여 침략하였을 뿐 아니라 (중략) 그 중에서도 전투에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은 현자총통인데 각 전선에 분배된 숫자가 매우 부족합니다. 신이 가까스로 주조해서 만든 것이 겨우 30여 병(柄)인데 역시 부족합니다. 넉넉하게 주조하려 해도 공사전이 모두 고갈되었으므로 아무리 헤야려 보아도 조처하기가 어렵습니다. 철물의 출처에 대해 조정에서 선처하소서.


이순신과 같이 명량해전에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고 이순신이 전사하고 난 후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된 김억추가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바로 고금도를 중심으로 무기를 제작하고 보급하며 나아가 왜구를 막는 핵심요로로 고금도와 청산도를 말하고 있다. 그럼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한 이순신은 이 사실을 몰랐을까? 이순신이 전사한 불과 2년도 안된 시점에서 김억추가 밝힌 내용이다. 더 나아가 고금도에 진을 친 후 전라우수사 안위가 보낸 장계[선조31년(1598) 3월 18일]이다.
<이순신과 함께 소속된 각 관포의 전선을 거느리고 강진의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비(戰備)를 다시 조치하고 더욱 새롭게 하여 변란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안위의 장계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즉 전비를 다시 조치하고 더욱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섬인 고금도에서 준비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군사적 무기를 개발하고 비치하고 준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우리가 기록은 없지만 구체적인 증거물로 나타난 ‘가리포상’의 무기를 말한다고 본다. 새로운 무기를 보급하고 이전까지와는 다른 화약과 무기를 준비하여 인력의 부족을 메울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보고인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이순신은 잡다한 집안내력에다가 집안노비의 이야기까지 기록하면서도 조선수군의 무기나 선박의 제조기술 내지는 방법 등 군사기밀에 속할 수 있는 사항은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완도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가리포상’의 표식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없는 역사일까? 아니 이순신과는 전혀 무관한 즉 임진왜란과는 무관한 무기였을까? 조선의 우수한 화약과 대포 무기로 이순신은 전술적 승리를 한 것이지 맨손으로 이룬 결과는 결코 아닐 것이다. 이순신 혼자만의 전략과 전술, 의지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니라 부족한 병참과 군사력을 보충하고 보완할 수 있는 신기술과 신무기가 개발되고 충분한 군량이 보급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완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는 장계[선조31년(1598) 12월 7일]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신이 고금도에 들어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그가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중략)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다.
참으로 거대한 전략적 거점으로서 확신을 가지고 고금도에 들어왔음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완도의 유배온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이순신의 고금도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정말 완도 고금도가 가진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파악하고 이점(利點)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이순신의 능력 덕분에 고금도가 임진왜란을 끝장낼 수 있는 역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완도가 가진 또 다른 세계적인 전략가인 장보고에 의해서도 발휘된 적이 있다. 장보고가 가진 혜안을 가지고 완도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임진왜란을 마무리하게 만든 최고의 전략적 거점이 바로 완도 고금도였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순신의 분명한 전략적 거점은 여수와 완도뿐이다.
이 두 곳에서 이순신은 자신의 전부를 불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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