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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여덟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8]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2.13 15:37
  • 수정 2019.12.1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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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강희제의 초상 초상 속의 용의 무늬는 황칠을 칠한 것으로 획인이 된다.

일본에서는 황칠을 약재로 사용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도료로서는 금칠(金漆)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의 황칠과 유사한 안료가 사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금칠의 기원에 대한 고찰이 없이 금칠을 ‘코시아부라’, ‘타카노쯔메’, ‘카쿠레미노’ 등으로 부르는데 명칭에 대한 검토를 한 결과 ‘카쿠레미노’를 황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현재 일본에 분포하는 금칠인 ‘코시아부라’수(樹)가있었다고 해도 상록수로서 관동이서(關東以西) 지역의 따뜻한 지역에서 많이 나오는 카쿠레미노수는 신라의 황칠수(黃漆樹)가 그 기원이 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 수종(樹種)은 아마 8세기 중엽에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거나 아니면 당시 재일 신라인 사회를 조직하고 있던 신라인들과 청해진을 설치하여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수행한 장보고(張保皐)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 된다.

일본의 황칠 연구가는 “일본, 중국, 한반도 등에서 갑옷과 화살촉 등의 방록과 장식을 위해 칠했다. 그 발색은 황금색으로 빛났다고 한다. 중국, 한반도에서는 황칠이라고 불리며 근현대 일본공예에서 말하는 황칠은 에도시대에 개발된 옻에 석황을 섞어 누렇게 발색시킨 것을 말한다.”

또 다른 연구가는 “일본에서는 헤이안 시대 무렵, 중국에서는 당대에 걸쳐 사용이 단절되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되어 일본 통치 시대의 쇼와 초기까지의 예가 있다. 금칠 사용이 단절된 경위에 대해서는 옻보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점, 수지액 채취가 옻보다 소량으로 곤란한 점, 칠공예와 파종기법의 기술 향상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나라, 헤이안조 시대에 중국, 한반도, 일본, 발해국 등 동아시아에서 주로 갑옷이나 화덕의 방록과 황금색의 발현에 금칠을 하는 기술이 수행 되었다. 정창원-일본 나라현 도다이사에 있는 왕실의 유물 창고. 창건연대는 쇼무왕(聖武王)대인 덴뵤(天平)연간(729~749)으로 추정되며 왕실의 유물창고이다.-보물로 많이 남아있는 소위 밀다화의 유품에 사용된 도료는 이 금칠이 아닌가? 라는 설도 있다. 금칠이란 우고기과의 목본식물인 카쿠레미노를 말한다.“고 연구 결과를 상재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 알려진 ‘청나라 가구 연구’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청나라 궁중에서도 황칠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요약본은 다음과 같다.

“이미 그려진 노란 금빛 가구의 용 모양의 대부분의 모양은 강희 중기부터 만기에 이르기 까지 일관된 특성을 보여 주며, 이는 황화리 나무 가구가 인기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황칠을 사용해서 그려진 회화와 황화리나무 가구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중국 고전 가구의 황금시대를 공동으로 설명한다. ~중략~  

황칠은 왕실과 귀족의 호화로운 스타일의 좋은 예이며, 색상 미학에서는 그 당시 황화리 가구의 인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현상은 결코 우발적 인 것은 아니며, 많은 황칠을 궁정 가구의 용의 패턴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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