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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나무 이야기 열둘

[배철지의 완도 황칠 이야기 12]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01 11:48
  • 수정 2019.11.0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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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남동 금입택 유적에서 발견된 875~886년대의 황칠 덩어리.

황칠로 칠한 기물로 괘연(掛硯)도 있다. 괘연은 패물 등 귀중품을 넣어두기 위하여 여닫이 문안에 여러 개의 서랍을 설치한 일종의 금고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일본 목궤의 일종인 문서궤를 ‘갑비수리’나 ‘갓계수리’, ‘각끼스리’, ‘각개수리’라고 부른데 에서 유래하여 ‘가께수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1651년에 도쿠가와 이에미쓰(德川家光)의 죽음을 알리는 차왜(差倭: 조선 후기 일본의 대마도에서 조선에 수시로 파견한 외교사절)가 서계를 가지고 내조(來朝)하였는데 이 때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에게 황칠 괘연을 하나씩 선물 하였다. 대마주태수(對馬州太守)가 예조 동래 부산에 보낸 서계를 기록한 『각사등록(各司謄錄』 영조29년1753) 4월 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황칠 괘연은 임진왜란 때 많이 잡혀간 조선의 장인들이 대마도에서 완도의 황칠을 이용하여 만든 기물이라고 생각 된다.

하지만 전란을 겪은 후라서 나라가 안정되지 못한 탓인지 황칠의 생산도 어려움에 처했을 것이니 조선후기 송시열의 정적이자 남인의 거두 윤선도의 묘비명과 신도비문을 짓고 과거에 급제 하지 않고 우의정까지 역임한 미수허목(許穆, 1595~1682)이 지은 『기언별집(記言別集)』에서 “황칠은 동이에서 생산 된다고 했는데 찾아볼 길이 없네.(黃漆誌云東夷之産. 而無困得見).”라고 임진왜란 이후 황칠을 보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당시에 그만큼 찾기가 어려웠다는 기록이다.

1718년 예장도감에서 길흉에 관한 의장에 관해 아뢴 내용 중 그 준비물에 왕실의 무덤에 함 봉하던 기물중의 관(棺)에 황칠을 칠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성호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의 지도를 받았다. 『성호사설』을 해석하고 일부 수정한 『성호사설유선』을 편찬하였다. 안정복은 여러 가지 지식을 담은 『잡동산이(雜同散異)』를 편찬하여 ‘잡동사니’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는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세 섬이 있어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나무껍질을 벗겨 진을 취하여 쓰는데 빛깔이 금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한 이정조(李廷藻)에게 보낸 편지를 수록한 『순암문집(順菴文集)』에서“ 북도의 용편초나 남해의 황칠은 모두 진귀한 산물이니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19세기 초기에 펴낸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황칠은 전라도 가리포 즉 완도에서 난다. 우리나라 온성 가운데 오직 이 섬에서만 황칠이 난다 (謹安黃漆金産於康津加里浦島古所謂莞島也我邦一城惟此島産黃漆).”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완도 가리포를 정확하게 지칭하여 황칠이 난다고 구체적인 지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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