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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신성한 것들

[완도 시론] 정택진 / 소설가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11.01 11:26
  • 수정 2019.11.0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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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택진 / 소설가

인간에게는 신성한 것들이 있다. 시대에 따라 또 사회에 따라 그 대상은 달라지지만 그래도 인간의 세계에는 항상 그것이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종교일 것이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태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가 신봉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지상최대의 경건함을 갖는 게 종교인들의 공통된 태도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인지는 모르겠으나 현대사회로 올수록 신성한 것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건 사실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것은 과거에 신성했던 대상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 시대에 맞는 대상을 세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ㅇ 그것은 신성하지도 경건하지도 못하며 때로는 그 시대의 타락한 정신을 표상하는 기괴한 기념물인 경우가 허다하다. 거대한 자본이나 개인 숭배적인 것들을 보라. 우리가 거기에서 어떤 경건함을 느끼겠는가.

대한민국의 많은 동네에도 있듯 우리동네에도 당산나무가 있다. 그 커다란 나무를 우리는 ‘사장나무’, 그 나무가 서 있는 곳을 ‘사장캐’라 불렀다. 매년 정월초하루면 이곳에서 ‘당지(당제)’를 모셨다. 제주(祭主)로 정해진 사람은 상갓집을 가지 않았고, 흉한 것을 피했다. 제사 며칠 전에는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쳤다. 

그믐날이면 사장캐로 통하는 길에 붉은 흙 한 줌씩을 걸음마다에 놓아 잡귀의 접근을 막았다. 그믐날 저녁 조상들께 상을 차리면 다른 식구들은 다 집을 나갔고, 제주는 혼자 집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제주는 소변을 보고 와도 목욕을 새로 하고 그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초하루 새벽에 수퉁절에 가 찬물로 몸을 씻고는 거기서 길러온 물로 밥을 한다. 새벽을 택한 것은 사람과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초하루 낮에는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보내고는 저녁에 나물 세 가지와 밥, 그리고 소족으로 끓인 국으로 사장나무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는 동네사람들도 바깥 출입을 삼갔다. 혹여 제주를 만나 신성함을 흐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자라면서 본 가장 신성한 모습이다. 그 추운 새벽에 약수터에 가 찬물로 몸을 씻는 것도 놀랄 일인데, 소변만 봐도 목욕재계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사실에 나는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가 이러했으니, 특별한 정성을 들이려는 경우 말고는 대부분 제주가 되는 걸 피했다는 말이 수긍이 갔다. 통시 갔다올 적마다 새로 목욕재계를 하고, 그 새벽에 약수터에 가서 그 찬물로 목욕을 하는 것이 보통 일이었겠는가.

아침에 배를 타고 나오는데 장의차가 보였다. 시신이나 유골을 모셔놓고 가는 것이리라.
“어느 동네 초상났다요?”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물었다.
“동네 이름은 모르겠고, 왼쪽으로 돌아 저 끝에 모래사장 지나 왼쪽 동넵디다만.”
“아 상서리구마.”
그러고는 나는 역부러 물었다.
“오른쪽으로 돌믄 가까울 건디.”
“동네 어른 한 분이 있었는데, 오른쪽으로 돌면 안된다든디요.”

오른쪽으로 돌면 당집이 있다. 지금은 ‘서편제’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는 ‘당집’이다. 예부터 당집 앞으로는 상여가 지나갈 수 없었다. 섬사람들에게 그것은 신성하고 경건한 곳이었다.

하잘것없더라도 우리에게는 아직 당집이 있다. 그 앞으로는 상여나 장의차가 지나가지 못하는 게 청산사람들의 금기가 되어 있다. 나는 그것이 청산도에 아름다움을 하나 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꼭 ‘슬로시티’라는 이름과 엮일 이유는 없다.

청산도가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어느 날, 그 당집 옆의 널찍한 바위에서 문명한 인간들 너덧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비싼 외제차 두 대가 서 있다. 알게 설명을 하는데도 고기 집게를 든 인간은 버럭 성질을 냈다. 신성한 것 대신에 자본을 놓고, 경건한 것 대신에 고깃점을 놓은 미개한 현대문명을 보는 것 같아 내심 마음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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