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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총선 '완도 국회의원 만들기' 청년 규합, 청년회 창립 계기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 완도 근현대사 한축 담당 청년회 역사 찾기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6.10 15:41
  • 수정 2019.06.10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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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24일 완도군 청년회 현판식 / 완도군청년회 회관준공기념 특집 회보 '청해진'사진자료

편집자 주> 본 특별기획은 완도군 청년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완도 근·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해왔던 청년회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미래적 가치를 함양하기 위한 완도군청년회-완도신문 공동 청년프로젝트이다.
이번 호는‘해방 이후 청년회 전사와 1979년 완도군 청년회 창립 배경’을 주제로 완도군청년운동사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완도군 청년회관 준공 기념특집으로 1981년 7월 1일 창간·발행된 완도군 청년회보 ‘청해진’엔 현재 완도군 청년회가 창립되기 전 완도지역의 청년단체에 대한 간략한 연혁이 소개돼 있다. 이 연혁을 통해 간략하게 나마 완도군 청년회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1946년 민족청년단 완도군단부 조직(단장에 장봉주 취임)을 시작으로 1947년 대동청년단 완도군단부 조직(단장에 김완주 취임), 1949년 8월 대한청년단 완도군단부 조직(단장에 김완주 취임), 1953년 7월 대한청년단 완도군단부(단장에 박창제 취임), 1954년 대통령령 제 813호에 의거 민병대로 통합(일체의 청년단체 해산), 1965년 4월 완도군청년회 조직(회장에 김동한 취임), 1966년 10월 해체, 1979년 1월 11일 45명이 완도군 청년회 발기(준비위원장에 김용웅 추대), 1979년 1월 14일 창립총회(초대회장에 김용웅 취임)까지다.

완도군청년회 초대 김용웅 회장의 회상으로는 사실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등은 우익청년단체들인데 완도에서는 정치이념적 성향보다 지역적 유대로 연결되는 측면이 더 강했던 것 같다.

“해방 후 청년회가 전국적으로 생겼다. 그러나 자유당이 독재하니까 전부 다 야당 세력화가 됐다. 67년 공화당 박정희 대통령 선거 하니까 완도에서 김대중 표가 많이 나왔다. 왜 많이 나왔냐? 선거 전 보고 받았을 땐 자기가 압도적으로 이길 줄 알았는데 겨우 이긴 거다. 이거 뭔일이냐? 알아보니 전국 청년회가 전부 민주당, 야당을 (선거운동을)해버린 거다”

“이거 없애 버려야 되겠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이 사회단체 등록법란 걸 만들었다. 그때 당시 1억 자산을 가진 단체라야 등록할 수 있었고, 그 외 별도로 로타리클럽, JC 등 국제적인 조직을 가진 단체만 예외였다. 청년회와 번영회만 없어져 버렸다”

계속되는 김 초대 회장의 말이다.

“박정희 정권의 사회단체 등록법에 의해 67년도 번영회가 없어지니까 전부다 상공회의소로 통합됐다. 군에만 번영회가 유명무실하게 존속했다. 있는데는 있고 없는데는 없었다. 완도군 은 황권태 씨가 번영회장하고 있어 함부로 손을 못댔다.”

“당시 완도군 청년회는 김동한 씨가 회장하고 있었는데 못하게 하는데도 억지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 구속시켜 버린다고 하니까 도정공장하고 있었는데 정부미 배정을 안줘서 공장이 놀게 돼 먹고 살길이 없어졌다. 청년회를 해산하고 회장직 포기해 버려 청년회가 결국 맥이 끊겨 없어졌다”

그러다 지금의 완도군 청년회가 창립된 것은 1979년 1월 14일이었다. 78년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12월 12일 실시될 예정이었는데 각 지역구에서 1구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제를 통한 직접선거로 154명을 선출하였고 간접선거로 선출된 유신정우회 소속 77명을 포함해 모두 231명을 뽑았다.

그 당시 완도 후보들이 황권태, 이선동 씨 등을 포함해 78년 총선에서 완도 후보가 난립했다고 한다. 김 초대 회장의 얘기로는 완도 출신 후보를 국회의원을 만들기 위한 것이 완도군 청년회의 창립 배경이었다고.

“완도에서 후보가 여럿 나오면 공화국 사무국장 길전식 씨가 권력 서열 4위였다. 장흥, 강진, 영암, 완도 4개군에서 2등까지 당선되는데 시골에서 자기가 1등 안하면 안되니까 인구 많은 완도군에서 국회의원이 나오면 어려웠다. 자기가 장흥, 완도 표 합해야 1등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완도서 국회의원 못나오게 막았다. 그러니까 주로 누구 추천했냐면 완도 출신은 배제하고 강진의 유재인, 황호동 이런 식으로...”

“우리가 안되겠으니까 서울에서 단일화 한다고 황권태 씨가 올라갔다. 그런데 단일화 안되고 있는데 이선동 씨가 꾀를 부려 자기가 급한 일 있다고 내일 모레 합시다 하고 모임을 연기시켰다. 완도 내려와서 자기로 통합됐다고 해버렸다. 완도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교통, 통신 나쁠 때라 그랬는가 그랬다. 완주 씨가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완주씨 집에서 한 30명 모태 놓고 완도 국회의원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선동이 단일화 됐다니까 이선동 밀어주기로 해버린 것이다. 나중엔 보니 그게 아닌데 결정해 버리니까 바꿀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선동 씨를 국회의원 만들게 됐는데 대체 세력이 없어 청년들이 뭉쳐 줘야 되겠다. 김동한, 이용석 씨 조차 선동 씨가 됐으니 어쨌든가 됐으면 밀어줘야 되지 않겠냐 해서 청년들 규합했다. 처음에 60명 모였다가 나중에 80명 됐다”

“그때 선거에 우리가 상당히 유리했는데 노화와 금일 선거를 포기해 버린게 패인이 됐다. 그때 완도서 노화도 선거책임자로 이인종을 보냈는데 공화당 선거책임자 신익현 씨가 지서장을 시켜 불법선거운동으로 체포한다고 협박하니 인종이가 나와 버려서 노화 선거가 포기돼 버리고, 금일도 선거운동 자금을 얼마 보냈는데 그걸 가지고 선거책임자가 도망가 버렸다. 완도, 금일, 노화가 인구가 많았는데 완도만 살고 금일, 노화가 죽어버렸다. 그래서 이선동 씨가 3천표 차로 3등으로 낙선해 버렸다. 모두 애석해 했다. 3천표 차이면 그때 완도가 인구 10만명 이상이라 얼마 표 차이도 아니었다” 

이렇게 10대 총선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청년들이 규합됐고, 78년 11월에 청년회를 새로 조직하자고 청년회 결성 준비위원회가 만들어 졌다.(계속)

<다음 편에서는 '완도군청년회 활동내역'을 주제로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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