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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완도 원불교 독립운동가 집중 조명

원불교 공동학술대회서 완도출신 오미산 김영현 지해원 선생의 독립운동 조명 돼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9.03.12 09:14
  • 수정 2019.03.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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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원불교법인성사 100주년 기념을 맞아 완도지역 원불교인으로 독립운동가였던 오미산, 김영현, 지해원 선생을 조명하는 원불교사상연구원 공동학술대회가 지난 14일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회의실(3층)에서 열렸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원불교학회의 주관으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은 소남 김영현 선생을 비롯한 오미산 지해원 선생의 발자취에 대해 조명했다. 

김 위원은 “미산 오미산 선생은 완도군 고금면 영창리 출신으로 경성고보 임시교원양성소 졸업하고 완도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 활동하다 1927년 완도 중학원에서 오석균의 사회로 신간회 완도군지회 창립총회가 열릴 때 참여한 인물로 한국민주당 발기인, 사로당 감찰위원, 1947년 근로인민당 준비위원회 정치협의회 위원으로 참여하고 1958년 원불교에 입교했다"고 밝혔다.

이어 "소남 김영현은 완도설군의 아버지 이도재(1848∼1909)를 만나 글을 배웠는데, 1923년 군외면 교인리에 사립교인학교를 세우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폐쇄당하여 교인학교를 뜯어서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동명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여 못쓰게 하였기 때문에 영창간이학교라 개명하였다.

이후 『청해비사』, 『진한국마한사』등을 저술하며  2천여 문하생을 배출하는데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해 1958년 원불교에 귀의했다. 청산 청계 출신인 근산 지해원선생은 완도공립보통학교 5학년 재학 때 식민지교육 철폐를 위한 동맹휴학을 선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출감후 농촌문맹퇴치운동을 전개 하다가 1932년 일본으로 가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도 하면서 1950년 원불교에 입교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김영현이 주도한 완도소비조합(완도상회) 운동은 1920년 완도면 당산리 완도공립보통학교에서 완도청년회 개최를 할 때 “우리 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이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만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경제의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계획해야 한다.”고  피력했다고.

이후 소비조합운동은 뜻대로 되지는 않아 완도상회로 변경하고 김봉현 외 35명으로부터 280원의 출자를 얻어 주임이 되어 제 잡화의 판매를 개시하는데, 완도 청년회 연설과 소비조합, 완도 상회 등이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 관리 및 일본인을 배척하도록 교사·선동하였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돼 징역 3월을 받았지만, 대구복심법원 2심에서는 무죄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며 미산 오미산과 소남 김영현이 선생이 함께 활동하면서 추구한 교육계몽사업은 항일 의식의 고취라는 시대적 소명과 함께 교육을 통해 평등 추구, 이같은 교육운동을 통해 배출된 후학들은 완도 곳곳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고.

이처럼 항일민족독립운동은 시대를 앞서간 선지자들이 당대의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부대끼며 극복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 같은 에너지가 자연스레 종교운동으로 전환되어 원불교 귀의로 종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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