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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만세운동, 천안 아우내장터보다 보름 더 빨랐다

[3ㆍ1 운동 100주년 특집] 2. 3ㆍ1 운동과 완도 3ㆍ15 만세운동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9.02.28 15:54
  • 수정 2019.02.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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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황제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는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과 평양 등 전국 여섯 개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경성에서 3·1 운동을 목격한 천안 출신의 유관순은 3·1 운동 직후 총독부가 휴교령을 내리자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유중권, 숙부인 유중무 등에게 경성의 상황을 전하고 4월 1일 아우내장의 장날에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작되어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일본과 연해주 등 해외에서도 벌어져 1년여 동안이나 지속됐다. 임종국의 《실록 친일파》에 따르면,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3·1 만세운동은 독립선언서가 본래 낭독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서울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 시위가 발생했다. 몇십 만명이 동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들은 진압하다 못해 폭력을 휘두르게 되고, 그에 더 자극 받은 한국인들의 운동이 그 규모를 더하였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됐다.

우리는 3·1운동하면 보통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과 ‘유관순’을 떠올린다. 그만큼 3·1 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사건이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계기로 3·1 만세운동은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사실상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완도의 3·1 만세운동은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보다 보름 정도 더 빨랐다. 그 중심에는 송내호 선생이 있었다. 1919년 3월 전국에 걸쳐 3·1 만세운동이 열렬히 전개됐다. 우선 송내호 선생은 고향으로 내려와 소안의 정남국, 최형천, 신준희, 김경천, 강정태, 백태윤, 완도읍의 나봉균, 최사열 등과 협의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 15일 완도읍에서 수백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 육영학교 졸업생으로 중화학원과 영흥학원 교사였던 송내호 선생이 중심이 되어 3월 15일 소안도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을 이어 1905년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신민회 등 여러 단체가 중심이 돼 학교설립운동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송내호 선생이 초등학교 과정으로 다녔던 사립완도육영학교도 그러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또 송내호 선생이 중등과정으로 진학한 사립중앙학교는 애국계몽인사들이 경영한 학교였다. 1908년 애국계몽운동 계열인 김윤식, 이상재 등 기호흥학회에서 설립한 사립기호학교와 1909년 유길준 등 흥사단에서 설립한 사립융희학교는 1910년 11월 김윤식을 회장으로 한 중앙학회로 발족됨에 따라 하나의 학교로 합해지고 명칭도 사립중앙학교로 개칭됐다. 따라서 중앙학교는 “전국을 총망라한 애국지사의 심혈이 응결돼 이루어진 민립학교”였던 것이다.

송내호 선생이 1911년 입학해 수학할 때는 윤치오가 교장이었고, 송내호 선생이 졸업하기 수개월 전에 유길준이 교장에 취임했다. 윤치오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로 학부 학무국장을 지내다 흥사단을 조직하고 교육계몽운동에 종사하였던 인물이고, 유길준은 다 알다시피 개화파의 거두로서 합병 때 일제의 작위 수여를 거절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들이 교장이었던 중앙학교는 이 학교 학생들이 1919년 3·1운동 때 적극 가담하여 송진우 교장 등이 투옥되었던 것처럼 민족운동의 전개에 기여한 바가 컸던 것이다. 송내호 선생이 이러한 전국적 애국계몽운동 계열 인사들이 모여 설립한 중앙학교에서 공부했던 것, 또 중앙학교의 거교적 3·1운동 참여 등은 그의 민족운동 전개에 커다란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4년 3월 20세의 나이로 중앙고보를 졸업한 그는 곧장 고향에 내려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교육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비밀결사인 수의위친계와 배달청년회를 비밀리에 조직해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송내호 선생은 암울했던 1910년대 중엽부터 교사로서 또 조직운동가로서 고향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18년 송내호 선생은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다시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완도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이 무렵 그는 태을교에 가입하여 경향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족운동의 확산에 노력했다. 이 무렵 그는 1918년말 유배돼 온 신민회 간부 양기탁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양기탁과 연락하며 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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